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지식의 차원
황량한 달 기지의 복도를 따라 걸어가던 민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은은한 푸른빛으로 바닥을 물들였다. 그 순간, 빛의 입자들이 갑자기 소용돌이치며 모여들더니 한 노인의 형상으로 서서히 구체화되었다.
이곳에 내가 나타날 수 있다니, 우주의 신비는 참으로 깊구나. 내 이름은 세종, 한글을 창제한 자이니라. 젊은이, 너의 영혼이 나를 불렀도다.
민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깜빡였다. 기지 생활 3개월 차, 드디어 우주 망상증이 온 걸까? 저...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요?
환각이라... 세종의 모습이 달빛 속에서 부드럽게 웃었다. 네 생각보다 우주는 훨씬 더 신비로운 곳이니라. 문자와 소리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우주의 기본 입자와 같은 존재라네. 한글의 창제 원리는 음양의 조화, 우주의 섭리를 담고 있거늘.
민호의 목덜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주변 온도가 갑자기 떨어진 듯했다. 어...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죠? 그리고 왜 제게 나타나신 겁니까?
세종의 형상이 창밖 달 표면을 가리켰다. 그의 손이 닿자 창문이 거대한 화면으로 변했다. 저것을 보아라. 네가 매일 연구하는 그 무늬들...
창문에는 민호가 연구 중이던 달 표면의 이상한 무늬들이 확대되어 비쳤다. 그가 한 달 넘게 분석해온 미스터리한 패턴들이었다.
세종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눈앞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이지.
물론 알죠. 민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게 이 무늬들과 무슨 관련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종의 손짓으로 무늬들이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패턴들은 점차 한글 자음 'ㄱ', 'ㄴ', 'ㄷ'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보이느냐? 세종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니라. 너희보다 먼저 이곳에 도달한 존재들이 남긴 메시지라네. 그들은 한글과 같은 원리로 우주의 언어를 만들었다.
갑자기 기지 전체에 붉은 경보등이 켜지며 사이렌이 울렸다. 경고: 산소 공급 시스템 오작동. 모든 대원은 대피소로 이동하시오. 반복합니다...
민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산소가... 끊긴다고요? 이건 재앙이에요!
세종의 눈에서 별빛 같은 광채가 번쩍였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이니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 무늬들은 단순한 패턴이 아니라 산소 분자의 양자 진동을 시각화한 것이니라. 달의 광물에서 산소를 추출하는 비밀이 그 안에 있느니라.
그때 세종의 형상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공간이 뒤틀리며 그의 모습이 흐려졌다.
제발, 더 자세히 알려주세요! 민호가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빛을 통과했다.
세종의 목소리만 남았다. 기억하라,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본으로 돌아가 생각하는 것이니라. 한글의 창제 원리처럼 자연의 소리를 관찰하고, 그 패턴을 찾아내면 된다. 낫을 보고도 기역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지어다...
마지막 말이 사라지자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산소 경보음만이 귓가에 울렸다.
민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듯 달 표면의 무늬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무늬들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산소 분자의 공명 패턴이야! 그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다시 한번 그 패턴들을 바라보니, 달의 광물에서 어떻게 산소를 추출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이 명확히 보였다.
민호는 급히 실험실로 달려가 장비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달 표면의 무늬대로 광물 분해 주파수를 조정하자, 기적처럼 산소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산소 경보가 멈추고 초록색 안전등이 켜졌다. 민호의 모니터 화면 구석에 잠시 한글 'ㄱ' 자가 반짝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미소 짓듯이.
민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더니... 정말 그랬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심오한 비밀을 담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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