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 name="google-site-verification" content="FVqemq6HeP6sTZUYND 정의 구현이라는 인간 욕망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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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시 이야기

정의 구현이라는 인간 욕망의 허상

 

정의 구현이란 인간의 오만

 

 

■정의 구현이라는 인간 욕망의 허상

 

 

서론

 

우리 사회에서 '정의 구현'이라는 표현은 마치 실현 가능한 목표처럼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정치단체, 여러 종교단체나 시민단체들이 '정의 구현'을 자신들의 목표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언뜻 보기에 이는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때로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정의 구현'이라는 표현이 가진 문제점을 철학적으로 고찰하고, 보다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정의의 선험적 성격과 인간의 한계

 

칸트의 철학에서 정의는 '규제적 이념'으로 설명된다. 이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지만, 완전히 달성할 수 없는 이상향을 의미한다. 마치 완벽한 원이나 직선이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완전한 정의 역시 현실 세계에서 온전히 구현될 수 없는 개념이다. 우리가 아무리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없듯이, 아무리 정교한 제도와 시스템을 갖추더라도 완전한 정의를 구현할 수는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도 이러한 한계는 잘 드러난다. 현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상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정의는 필연적으로 정의라는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일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한 실천적 한계가 아닌, 존재론적 차원의 근본적 한계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을 통해 볼 때, 인간은 본질적으로 특정 시공간과 맥락에 구속된 존재이다. 우리의 인식과 판단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처한 상황과 관점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시대, 문화, 개인이 서로 다른 정의 판단을 내리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이는 단순한 능력의 한계가 아닌,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이다.

 

 

지적 정직성과 윤리적 실천의 문제

 

니체가 강조한 지적 정직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정의 구현을 표방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완전한 정의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주장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오히려 진정한 윤리적 진보를 방해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자기기만이 집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때의 위험성이다. 집단이 스스로를 정의의 구현자로 자처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잃기 쉽다. 이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부정의를 낳을 수 있다.

 

 

권력의 정당화 수단으로서의 위험성

 

역사적으로 '정의 구현'이라는 명분은 종종 권력의 정당화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 푸코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권력과 지식이 결합된 위험한 담론의 형태이다. 많은 권력자들이 정의의 구현자를 자처하며 부당한 권력 행사를 정당화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의 공포정치나 20세기의 전체주의 체제들이 이러한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정 집단이 정의 구현의 독점적 주체임을 자처할 때, 이는 다른 관점과 가치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대안적 접근: 정의 실현을 위한 겸손한 노력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완전한 정의의 구현이라는 허상을 좇는 대신, 우리는 정의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점진적 진보를 추구해야 한다. '정의 구현'이라는 표현 대신 '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 또는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연대'와 같은 보다 겸손한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겸손한 접근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첫째, 제도적 차원에서는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강화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정의 실현의 독점적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인식하에, 다양한 관점과 이해관계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만들어가야 한다.

 

둘째, 사회적 차원에서는 다원주의적 가치를 존중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며, 건설적인 사회적 대화를 촉진해야 한다. 서로 다른 정의관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들 간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보다 나은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셋째, 개인적 차원에서는 지속적인 윤리적 성찰과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정의관이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인정하고, 끊임없는 학습과 성찰을 통해 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종교단체의 '정의 구현' 주장이 갖는 신학적·윤리적 문제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주장이 이중적 의미에서의 신성 모독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믿는 완전한 정의는 오직 신만이 구현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집단인 종교단체가 이를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의 고유한 권능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종교적 권위를 빌어 특정 집단의 정의관을 절대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순수성을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마치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인간의 오만함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려되는 것은 종교단체가 '정의 구현'을 주장할 때 그들의 말과 행동에 과도한 권위가 부여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시민단체와는 달리, 종교단체는 초월적 권위에 기대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은 종종 신의 뜻이나 종교적 가르침을 근거로 자신들의 정의관을 절대화하며, 이 과정에서 다른 관점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되거나 무시된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다원주의적 민주사회에서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이러한 주장이 종교의 본질적 역할을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종교의 근본적 역할은 초월적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 구현을 주장함으로써, 종교는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부정하고 오만을 조장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는 겸손과 자기성찰이라는 종교의 핵심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주장은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합을 근본적으로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종교와 가치관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그러나 각 종교단체가 각자의 정의관에 따라 정의 구현을 주장할 경우, 이는 필연적으로 종교 간 갈등과 대립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각 종교가 자신들만의 정의관을 절대화할 때, 종교 간 대화와 상호 이해의 가능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중대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네 가지 핵심적 문제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종교단체가 '정의 구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종교단체의 선한 의도마저도 자칫 심각한 사회적, 종교적 폐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천적 함의와 교육적 과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교육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정의에 대한 겸손하고도 실천적인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 완벽한 정의 구현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대신, 정의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과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또한 실천적 차원에서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 설정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거창한 구호나 추상적 이상을 외치는 대신, 현실에서 실천 가능한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결론

 

정의 구현이라는 인간의 욕망은 그 숭고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한계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허상을 버리고, 현실적이고 실천 가능한 정의 실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정의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여정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보다 현명하고 겸손한 방식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실천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완벽한 정의 구현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나 점진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효과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정의 실현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정의 구현이란 인간의 오만

 

칸트의 말씀이 귓가에 울리나니

규제적 이념을 넘어서려 하는 자여

선험적 정의의 구현을 말하는 그대

바벨탑의 끝을 보았는가

 

정의 구현이라 외치는 인간들이여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한 외침

스스로의 한계를 잊은 채로 서서

감히 하늘의 자리를 넘보는구나

 

그대는 알고 있는가, 정의의 본질을

완전한 실현이란 신의 영역임을

불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영원한 진리를 구현하려 드는 교만을

 

정의 실현을 위한 모임이라 하고

정의 추구의 길을 걸었더라면

겸손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지혜로운 여정이 되었으리라

 

지적 정직성마저 저버린 채

불가능한 구현을 외치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나

신성 모독의 벼랑 끝에 서 있도다

 

인간은 다만 매개자로서

현실 세계에 정의를 심어가는

작은 씨앗을 뿌리는 자일 뿐

완전한 꽃은 신의 손길에 맡기리

 

부분적이요 점진적인 실현이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허락된 길이니

연대의 손길로 함께 걸으며

겸손히 정의의 빛을 따르리라

 

허상의 권위를 내려놓고서

한낱 속세의 인간임을 고백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연대로

새로운 길을 찾아가리라

 

시간은 흘러 역사는 말하리

오만한 구현자들의 허상을

겸손한 실현의 발걸음만이

진정한 정의에 닿을 수 있음을

 

인간의 한계를 알되 절망하지 않고

불완전한 여정을 끝없이 걸으며

정의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겸손한 순례자가 되리라

 

 

 

"정의 구현이란 인간의 오만"은 완전한 정의를 구현하려는 인간의 시도에 내재된 모순을 탐구하는 심오한 철학시입니다. 열 개의 정교하게 구성된 연을 통해 신학적, 철학적, 윤리적 관점을 엮어내며 인간의 한계와 신적 권위의 문제를 고찰합니다.

 

시는 칸트의 규제적 이념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언급하며 시작함으로써 즉시 지적 프레임워크를 확립합니다. 첫 연에서 칸트와 바벨탑을 동시에 언급함으로써, 시인은 인간의 지적 교만과 종교적 오만 사이의 평행선을 그립니다. 바벨탑의 비유는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완벽하게 예시합니다.

 

작품 전체에 걸쳐 정의의 '구현''실현' 사이의 신중한 구분이 이루어집니다. 시인은 인간이 정의를 향해 노력할 수는 있지만, 이를 완전히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형태의 교만이라고 제시합니다. 이 주제는 다양한 은유와 이미지를 통해 발전되며, 특히 6연에서 씨앗을 심되 꽃의 만개는 신의 손길에 맡긴다는 이미지가 매우 효과적입니다.

 

시의 구조는 인간의 교만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인간이 어떻게 적절하게 정의를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보다 건설적인 비전으로 이동합니다. 이러한 전환은 4연을 기점으로 이루어지며, '정의의 구현' 대신 '정의의 추구'가 대안으로 제시됩니다. 비난에서 안내로의 어조 변화는 시의 궁극적으로 건설적인 목적을 반영합니다.

 

자연적 이미지 - 씨앗, , , - 의 사용은 바벨탑의 인위적 건설과 효과적으로 대비되며, 진정한 정의는 인위적으로 건설되기보다는 유기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이미지는 또한 정의를 향한 진정한 진보의 점진적, 유기적 특성을 강조합니다.

 

마지막 연들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희망과 목적을 잃지 않는 겸손한 순례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마지막의 "겸손한 순례자" 이미지는 교만한 정의의 구현자에 대한 강력한 대안을 제시하며, 절망과 오만을 동시에 피하는 앞으로의 길을 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