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 name="google-site-verification" content="FVqemq6HeP6sTZUYND 도의 오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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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너머의 이야기

도의 오묘함

 

도의 오묘함

 

고상무욕(故常無欲)과 이관기묘(以觀其妙)

 

故常無欲(고상무욕)

 

노자의 도덕경에서 "故常無欲(고상무욕)"이라는 구절은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깊고 다층적인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도덕경 1장에서 등장하며, ()의 본질과 인간의 인식 방식에 관한 노자의 근본적인 사유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먼저 '()'라는 글자는 단순한 접속사를 넘어 인과관계와 논리적 귀결을 나타냅니다. 이는 앞서 언급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는 도와 명칭의 본질적 한계에서 비롯된 결론적 사유임을 보여줍니다. 언어와 개념으로 도()를 완전히 포착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한계를 인정한 후, 노자는 그럼에도 도()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常無欲(상무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이지 않은, 항구적이고 본질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노자 철학에서 중요한 '상도(常道)''상명(常名)'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상도와 상명이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초월하는 영원한 도와 이름을 의미한다면, '상무욕(常無欲)'은 이러한 초월적 실재에 접근하기 위한 영원하고 본질적인 정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無欲(무욕)'은 단순히 욕망의 부재나 억압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집착과 의존성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욕()은 단순한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인간 의식을 왜곡하고 진정한 실재를 가리는 모든 형태의 집착과 편견을 포함합니다. 이는 불교의 무아(無我)나 무집착(無執着) 개념과도 유사성을 갖습니다.

 

노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욕망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목적이나 이익을 추구할 때, 우리의 인식은 이미 그 욕망에 의해 오염되고 왜곡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도()의 본질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常無欲(상무욕)'은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라,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인식 상태를 위한 필수적 전제가 됩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常無欲(상무욕)'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행동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常無欲(상무욕)'은 인위적인 욕망과 목적에 의해 주도되는 행동이 아닌,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무위(無爲)의 삶을 위한 정신적 토대가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 구절은 다양한 해석을 낳았습니다. 도가(道家) 전통에서는 이를 개인의 정신 수양과 내면적 평화를 위한 가르침으로 해석했으며, 정치철학적 맥락에서는 통치자가 민중에게 과도한 욕망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통치 철학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리학자들은 이를 인간 본성의 순수함을 회복하는 수양 방법으로 이해했습니다.

 

현대적 맥락에서 '常無欲(상무욕)'은 소비주의와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합니다. 끊임없는 욕망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은 오히려 더 큰 불안과 공허함을 낳을 수 있습니다. 노자의 무욕(無欲) 사상은 외적 조건이 아닌 내면의 평화와 충족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대안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도 '常無欲(상무욕)'은 현대 마음챙김(mindfulness)과 명상 기법과 연결됩니다.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현재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마음챙김의 상태는 노자가 말하는 무욕(無欲)의 상태와 많은 유사성을 갖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자아의 한계를 초월하고 더 넓은 실재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以觀其妙(이관기묘)

 

"以觀其妙(이관기묘)"는 노자 철학의 핵심적인 인식론을 담고 있으며, 무욕(無欲)의 상태가 단순한 목적이 아닌 도()의 본질을 경험하기 위한 방법임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실재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노자의 독특한 관점을 드러냅니다.

 

'()'는 방법이나 수단을 나타내는 글자로, 앞서 언급된 무욕(無欲)의 상태가 단순한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실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적 전제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노자 철학의 실천적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무욕(無欲)은 그 자체로 완성된 목표가 아니라, ()의 본질을 경험하기 위한 길()이 됩니다.

 

'()'은 단순한 시각적 인식이나 개념적 이해를 넘어서는 깊은 관조와 통찰을 의미합니다. 이는 서양 철학의 주체-객체 이분법을 초월하는 동양 철학의 비이원적(非二元的) 인식론을 반영합니다. 주체가 객체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구분이 사라지는 통합적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의 개념은 장자(莊子)'좌망(坐忘)'이나 불교의 '선정(禪定)'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이들 모두 일상적 의식 상태를 초월한 깊은 관조와 통찰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상태에서는 개념적 사고와 분석적 이성의 한계를 넘어, 직관적이고 전체적인 방식으로 실재를 경험합니다.

 

'其妙(기묘)'에서 '()'는 단순히 신비롭거나 기이한 것이 아니라, 언어와 개념으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도()의 심오한 본질을 가리킵니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현묘현묘 중유문(玄妙玄妙 衆有門)"이라 하여, ()의 심오함()과 오묘함()이 만물의 문()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가 단순한 신비주의적 경험이 아니라, 만물의 존재론적 근원과 관련된 개념임을 보여줍니다.

 

'()'는 앞서 언급된 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관조의 대상이 다름 아닌 도()의 본질임을 명확히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자가 도()를 직접적인 개념화나 정의를 통해 설명하지 않고, 무욕(無欲)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관조(觀照)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노자의 인식론은 서양 철학의 전통적인 인식론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서양 철학에서는 종종 분석적 이성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실재의 본질에 접근하려 하지만, 노자는 이러한 개념적 접근이 오히려 도()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신, 무욕(無欲)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직관적 관조를 통해 도()의 오묘함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천적 차원에서 "以觀其妙(이관기묘)"는 단순한 이론이 아닌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이는 일상적 삶 속에서 무욕(無欲)의 상태를 유지하며,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조는 특별한 의식이나 의례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실천이 됩니다.

 

현대적 맥락에서 "以觀其妙(이관기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정한 통찰을 얻기 어려운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끊임없는 정보 소비와 분석이 아니라, 내면의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관조를 통해 우리는 현상의 표면을 넘어 본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인의 정보 피로감과 인지적 과부하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상호 관계와 현대적 적용

 

"故常無欲(고상무욕)""以觀其妙(이관기묘)"는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철학적 체계를 이룹니다. 이 두 개념의 관계는 노자 철학의 이론과 실천, 존재론과 인식론, 방법과 목적의 불가분성을 잘 보여줍니다.

 

무욕(無欲)은 관조(觀照)의 전제 조건이며, 관조는 무욕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욕망과 집착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현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관조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이러한 관조의 경험은 욕망의 허구성과 일시성을 깨닫게 하여 더 깊은 무욕의 상태로 이끕니다. 이는 순환적이고 상호 강화하는 관계로, 노자 철학의 역동적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순환적 관계는 도덕경의 다음 구절인 "常有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와의 대비를 통해 더욱 명확해집니다. 욕망이 있는 상태에서는 도()의 표면적인 경계나 한계()만을 볼 수 있지만, 무욕(無欲)의 상태에서는 도()의 심오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인식이 그의 존재 상태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노자의 이러한 통찰은 현대 인지과학과 현상학의 발견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현대 인지과학은 인간의 인식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과정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조건, 감정 상태, 문화적 배경, 개인적 경험 등에 깊이 영향받는 체화된(embodied)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무욕(無欲)의 상태가 인식의 본질적 조건이라는 노자의 통찰과 유사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두 개념의 적용은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무욕(無欲)과 관조(觀照)는 현대인의 정신 건강과 내면적 평화를 위한 실천적 지혜가 됩니다. 끊임없는 욕망의 추구와 성취 지향적 삶에서 벗어나, 현재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내면의 고요함을 찾는 것은 현대인의 불안과 스트레스에 대한 해법을 제시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이 개념들은 현대 사회의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합니다. 끊임없는 경제 성장과 소비 확대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의 패러다임은 환경 파괴와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 충족감에도 기여하지 못합니다. 노자의 무욕(無欲) 사상은 소유와 소비가 아닌 존재와 경험의 풍요로움에서 진정한 충족을 찾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환경적 차원에서, 무욕(無欲)의 사상은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철학적 대응이 됩니다.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대상이 아닌, 인간이 그 일부로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전체로 바라보는 관점은 현대의 환경 윤리와 지속 가능한 발전 논의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무욕(無欲)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는 생태학적 전환을 위한 철학적 기반이 됩니다.

 

교육적 차원에서, "故常無欲(고상무욕)""以觀其妙(이관기묘)"의 통찰은 지식의 축적이 아닌 지혜의 계발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현대 교육이 종종 경쟁과 성취를 강조하며 도구적 지식 습득에 집중한다면, 노자의 관점은 내면의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직관적 통찰과 전체적 이해를 중시합니다. 이는 창의성과 통합적 사고를 중시하는 현대 교육의 새로운 방향과도 연결됩니다.

 

리더십과 조직 관리 차원에서도 이 개념들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무위(無爲)의 리더십은 과도한 통제와 개입이 아닌, 구성원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리더십 스타일을 의미합니다. 이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대 사회에서 더욱 효과적인 리더십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예술과 창의성 영역에서도 무욕(無欲)과 관조(觀照)의 관계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많은 예술가와 창작자들은 욕망과 의도에서 벗어나 깊은 관조의 상태에서 가장 순수한 영감과 창의적 통찰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노자가 말하는 무욕(無欲)의 상태에서 도()의 오묘함을 경험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초월적 지혜의 현대적 적용

 

"故常無欲(고상무욕)""以觀其妙(이관기묘)"2,500년 전 노자가 남긴 통찰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사회에 여전히 깊은 의미와 적용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개념들은 단순한 고대의 사상이 아니라, 현대의 다양한 위기와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관조하는 노자의 가르침은 정보와 자극의 홍수 속에서 방향을 잃기 쉬운 현대인에게 내면의 중심을 찾는 지혜를 제공합니다. 외적 성취와 소유가 아닌, 내면의 평화와 충족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노자의 관점은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의 한계를 경험하는 현대 사회에 대안적 가치관을 제시합니다.

 

무엇보다 "故常無欲(고상무욕)""以觀其妙(이관기묘)"가 제시하는 무욕(無欲)과 관조(觀照)의 상호 보완적 관계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욕망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 실재의 본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삶과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자의 이러한 통찰은 단순한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꾸준히 실천하고 체험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분주함과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내면의 고요함을 찾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노자가 말하는 도()의 오묘함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더 깊은 충족감과 조화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500년 전 노자가 "故常無欲(고상무욕)""以觀其妙(이관기묘)"라는 간결한 구절에 담아낸 영원한 지혜의 핵심일 것입니다.

 

 

 

상무욕관묘(常無欲觀妙)

 

욕망의 그물 벗어던진 고요한 마음

텅 빈 거울처럼 만물을 비추고

항상 무욕의 자리에 머무를 때

도의 오묘함이 스스로 드러나리

 

세상의 이름들 수없이 많아도

이름 붙이는 순간 참모습 사라지고

욕심의 안개 피어오를 때마다

도의 신비는 더욱 멀어진다

 

늘 욕망 없이 바라보면

천지의 시작을 고요히 관조하고

무와 유의 경계 넘어서는 곳

도의 심오함이 눈앞에 펼쳐진다

 

관이란 보되 보지 않는 것

마음의 눈으로 본질을 꿰뚫는 것

분석하고 쪼개는 지식 넘어서

전체를 한순간에 품어내는 지혜이다

 

상은 변함없는 자연의 이치

흐르는 물처럼 멈추지 않으며

인위적 노력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무위의 경지에서 도를 만난다

 

욕망의 파도 잠잠해진 호수에

달빛 고요히 내려앉듯

무욕의 정신으로 세상 바라볼 때

만물의 어머니인 도가 보이리라

 

이관기묘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자아의 경계를 조용히 허물고

주체와 객체의 구분 사라지며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하나 된다

 

현대의 소음 속 끝없는 갈망

더 많이 가진다 해도 채워지지 않고

고상무욕의 가르침 따라가면

내면의 평화가 저절로 피어나리

 

도의 묘함은 말로 다할 수 없어

침묵 속에서만 그 모습 드러내고

무욕의 거울로 비춰볼 때만

천지의 근원이 마침내 보인다

 

이천오백 년 지나온 노자의 지혜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말하고

욕망을 내려놓고 관조하는 삶

도의 오묘함에 이르는 길이라

 

 

 

 

 

"상무욕관묘(常無欲觀妙)"라는 이 시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가장 심오한 구절 중 하나인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의 철학적 깊이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천오백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 고대의 지혜는 현대 사회의 혼란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시의 첫 번째 연에서는 욕망에서 벗어난 마음의 상태를 '텅 빈 거울'에 비유합니다. 이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도가 철학의 핵심인 '()'의 개념을 정확히 포착한 것입니다. 도교에서 ''란 비어 있음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품은 충만한 비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거울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보유하지 않기에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듯이, 욕망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마음만이 도의 오묘함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연은 도덕경의 시작 구절인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름 짓고 개념화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오히려 실재의 참모습을 가린다는 역설을 표현합니다. "이름 붙이는 순간 참모습 사라지고"라는 구절은 단순히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화와 범주화를 통해 세계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 오히려 세계의 본질적 풍요로움과 유동성을 놓치게 만든다는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연에서는 도교적 인식론의 핵심을 탐구합니다. '()'이라는 행위는 서양 철학의 주체-객체 이분법을 뛰어넘는 독특한 인식 방식입니다. "보되 보지 않는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의도적이고 분석적인 관찰이 아닌, 자연스럽고 전체적인 인식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불교의 무심(無心) 상태나 현상학에서 말하는 '선입견 없는 관찰'과도 유사한 개념으로, 현대 인지과학에서도 주목받는 비이원적 인식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다섯 번째 연은 '()'의 개념을 탁월하게 설명합니다. 도교에서 ''은 서양 철학의 정적인 영원성과는 다른,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발견되는 불변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흐르는 물처럼 멈추지 않으며"라는 표현은 이러한 역동적 항상성을 완벽하게 포착합니다. 물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변화 속의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연에서는 무욕(無欲)의 상태와 인식의 관계를 더 깊이 탐구합니다. 호수의 표면이 잔잔할 때만 달빛을 온전히 반사할 수 있듯이, 욕망의 파도가 잦아든 마음만이 실재를 왜곡 없이 반영할 수 있습니다. 특히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하나 된다"는 구절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구분을 초월하는 비이원적 인식 상태를 가리키며, 이는 도교뿐만 아니라 동양 철학 전반에 걸친 핵심적인 통찰입니다.

 

여덟 번째 연은 고대의 지혜를 현대적 맥락에 적용합니다. "현대의 소음 속 끝없는 갈망"은 현대 소비주의 사회의 본질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끊임없는 욕망의 자극과 충족을 통해 행복을 약속하지만, 결코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역설을 지적합니다. 노자의 '고상무욕'은 이러한 소비주의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아홉 번째 연은 도의 불가설성(不可說性)을 다룹니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본질은 개념적 사고나 언어적 표현으로는 완전히 포착될 수 없다는 깊은 철학적 통찰입니다. "침묵 속에서만 그 모습 드러내고"라는 구절은 언어를 넘어선 직접적 경험과 침묵의 지혜를 강조합니다.

 

마지막 연은 노자의 가르침이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문명의 형태와 기술적 환경은 변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과 욕망으로 인한 고통의 역학은 여전히 유사합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 관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 번영의 길을 제시합니다.

 

이 시는 단순히 도교 개념을 시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넘어,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지혜로서 도교 사상의 지속적인 관련성을 보여줍니다. 무욕(無欲)에 대한 도교의 강조는 끊임없는 욕망의 자극을 통해 작동하는 소비자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대안적 서사를 제공합니다. 그 비이원적 인식론은 서양 철학의 주체-객체 분리와 그로 인한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자연 발생성(自然)과 무위(無爲)에 대한 강조는 통제, 노력, 성취에 집착하는 현대 문화에 대한 교정적 관점을 제공합니다.

 

복잡성, 정보 과부하, 환경 위기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세계에서, '상무욕(常無欲)'과 관조적 관찰의 고대 지혜는 단순히 개인적 위안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사회적 지혜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때로는 가장 진보적인 미래의 길이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과정에서 잊어버린 고대의 지혜를 재발견하는 데 있을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상무욕관묘"는 도교 철학의 핵심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동시에, 이러한 고대의 지혜가 어떻게 현대의 개인적, 사회적, 생태적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한 고대 텍스트의 재해석이 아니라, 점점 더 복잡해지고 불안정해지는 세계에서 균형과 지혜를 찾기 위한 살아있는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도의 오묘함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나

고요한 마음을 찾아가네

텅 빈 거울처럼 세상을 비추며

무욕의 자리에 머물러 봐

 

 

도의 오묘함이 스스로 드러나리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비밀

침묵 속에서 그 모습 보이네

무욕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수많은 이름들이 있어도

진정한 모습은 숨겨지고

욕심의 안개가 피어날 때면

도의 신비는 멀어져 가네

 

 

도의 오묘함이 스스로 드러나리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비밀

침묵 속에서 그 모습 보이네

무욕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관조란 보되 보지 않는 것

마음의 눈으로 본질을 보는 것

분석의 지식을 넘어서서

전체를 한순간에 품는 지혜

 

 

자연의 이치는 멈추지 않고 흐르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무위의 경지에서 도를 만나고

관찰자와 대상이 하나 되네

 

 

현대의 소음과 끝없는 갈망 속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천오백 년의 노자의 지혜로

내면의 평화를 찾아가네

 

 

도의 오묘함이 스스로 드러나리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비밀

침묵 속에서 그 모습 보이네

무욕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욕망을 내려놓고 (내려놓고)

관조하는 삶 (관조하는 삶)

도의 오묘함에 이르는 길

그 길을 함께 걸어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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